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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 모친상 별세 사망 이유

하춘화 모친상 별세 사망 이유

 

 

 
 
 
 
 
 
 
 
 
 
 

하춘화, 모친상…김채임 여사 101세로 별세

29일 하춘화 측에 따르면, 하춘화의 모친 김채임 여사가 101세를 일기로 전날 오후 5시20분께 별세했다. 2019년 7월 하춘화의 부친 하종오 옹이 역시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약 4년4개월 만이다.

하춘화 측은 "김채임 여사는 지난 60년여간 둘째 딸인 하춘화를 뒤에서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 해오신 강한 한국적인 어머니"라고 기억했다.

김 여사는 하춘화 외 춘매(전 라페데 대표)·춘엽(재미)·춘광(경남대 교수) 씨를 유족으로 남겼다. 조문은 30일 오전 11시부터 가능하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3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월2일 오전 8시30분이다. 

하춘화나이입니다 결혼식구입니다 부고향 재혼입니다 아이입니다

가수 하춘화는 1955년 6월 28일생으로 만 66세로 1961년 만 6세 때 '효녀 심천으로 돌아가다'라는 곡으로 데뷔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1991년 총 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며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여 현재까지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춘화는 전남 영암 출신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에 대해 "라디오만 있던 시절에 노래가 나오면 어린 제가 엉덩이를 치고 박자를 맞췄다고 합니다. 제가 노래를 한 번만 들으면 바로 따라 했어요. 그래서 얘가 여러 곡 불러서 써보니까 300곡을 흥얼거린다고 한다"고 설명했는데요. 당시 하춘화 나이가 3살이었대요.

 

 




어린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하종오 씨는 하춘화를 서울동아예술학원에 보냈고, 그곳에서 8개월간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 데뷔를 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시기적으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 데뷔한 어린 하춘화의 노래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선사하며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후 11살 때인 1966년 '아빠는 마드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정식으로 1971년 앨범을 발표, '물새 한 마리'가 히트하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어,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렀으며, 이 곡으로 TBC에서 4년 연속 여가수상을 수상하며 어린 나이에도 가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합니다.

 






하춘화는 이후 정상에 올랐고, 당시 무명 개그맨이었던 이주일에게 자신의 공연 진행자를 제안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됩니다.

 

 

이주일은 하춘화와 함께 일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고, "길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 집을 샀다"며 하춘화에 대한 감사와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존경했다는 거죠.

 






이후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하춘화와 이주일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의 기억에 대해서 입니다.

엄청난 폭발음이 전주까지 들렸을 정도였어요. 전쟁이 난 줄 알고 이렇게 죽는 줄 알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 시 전체가 암전됐습니다. 공연장이 폭파돼 내렸다"며 "그 순간 주일 씨 목소리가 들렸어요. 암전된 상태에서 구원 같은 목소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씨는 탈출했지만 저는 생각지도 못했고 결국 주일 씨의 머리를 딛고 탈출했다고 얘기했는데요. 그 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출하고 병원까지 업고 달려 무사했다고 합니다. 한편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기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고 하네요.

 









하춘화는 1979년 학업과 결혼 준비로 은퇴를 선언했고 1981년 기업인 정운찬 씨와 결혼했지만 활동을 재개하려던 하춘화 씨와 전 남편 정운찬 씨의 의견 차이로 1년도 안 돼 이혼하게 됩니다.

 

 

이후 다시 가수로 복귀해 '우리 사랑의 품에서', '연인 블루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고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에서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간 공연을 펼쳤습니다.

 






하춘화는 1995년 6살 연상의 KBS 기획조정실장이었던 이인순 씨와 재혼했고, 하춘화는 "언니 친구를 통해 중매쟁이로 남편을 만났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하춘화는 "내 히트곡이 뭔지도 모른다"며 중매쟁이인 줄 모르고 나갔는데, 잇따라 담배를 피우는 남편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는 거죠.

 



소개받은 후 1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인순 씨는 가수 하춘화에 의해 자신까지 유명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하더군요. 그 후 고민 끝에 만나기로 결심했고, 1년 후 크리스마스 디너쇼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춘화와 남편 이인순 씨 사이에 아이가 없어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아이가 생겼어요. 하지만 유산한 뒤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모든 일에 대해 서두르지 않고 도리에 따라 일을 진행하고 싶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하늘이가 공평한 게 저에게 큰 재능을 줬지만 아이는 안주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입양도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말리고 있었어요. 그런 마음이 있어서 고아원을 많이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많이 도와주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하춘화는 그동안 200억원이 넘는 기부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기부에 대해 "그때마다 하는 게 아니라 연중무휴로 한다"며 "19살부터 기부를 했는데 그 당시 서울의 100평짜리 집을 200만~300만원에 샀습니다. 당시 공연비는 수백에서 수천이었다. 받으면 바로 현금으로 기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춘화는 1991년 총 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함으로써 개인 최다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공연을 이어가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받은 사랑만큼 사회에 환원하고 공연을 위해 꾸준히 자기관리를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멋진 무대 오랫동안 보여주세요.